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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의 원작을 번역한 사람 본문

스페인어문학, 올라!

위대한 역사의 원작을 번역한 사람

③㎍ 2020. 9. 6. 00:00

Dice el que tradujo esta grande historia del original, de la que escribió su primer autor Cide Hamete Benengeli, que llegando al capítulo de la aventura de la cueva de Montesinos, en el margen dél estaban escritas de mano del mesmo Hamete estas mismas razones: "No me puedo dar á entenderm ni me puedo persuadir, que al valeroso don Quijote le pasase puntualmente todo lo que en el antecedente capítulo queda escrito la razón es que todas las aventuras hasta aquí sucedidas han sido contingibles y verisímiles; pero esta de esta cueva no le hallo entrada alguna para tenerla por verdadera, por ir tan fuera de los términos razonables. Pues pensar yo que don Quijote mintiese, siendo el más verdadero hidalgo y el más noble caballero de sus tiempos, no es posible; que no dijera él una mentira si le asaetearan. Por otra parte, considero que él la contó y la dijo con todas las circunstancia dichas, y que no pudo fabricar en tan breve espacio tan gran máquina de disparates; y si esta aventura parece apócrifa, yo no tengo la culpa; y así, sin afirmarla por falsa ó verdadera, la escrio. Tú, lector, pues eres prudente, juzga lo que te pareciere, que yo no debo ni puedo más, puesto que se tiene por 82) Lelia Madrid, op. cit., p.39 - 103 - cierto que al tiempo de su fin y muerte dicen que se retrató della, y dijo que él la había inventado, por parecerle que convenía y cudraba bien con las aventuras que había leído en sus historias."(Ⅱ, pp.238-239) 이 위대한 역사의 원작을 번역한 사람이 원작자 시데 아메 테 베넹헬 리가 쓴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몬테시노스 동 굴의 모험에 대한 장에 와서 아메테 본인이 손으로 글의 가장 자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썼다고 한다. “내가 이해할 수 없고,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앞 장에 쓰인 모든 것이 용감한 돈 키호테에게 정확하게 일어났는가하 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까지 일어난 모든 모험들은 있을 법 했고, 사실 같았으나 이 동굴의 모험은 이성적인 한계를 넘어 서 진실로 받아들일 만한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진 정한 시골 귀족이고 그의 시대의 가장 고귀한 기사인 돈 키호 테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만약 그를 화살로 죽인다 해도 그는 거짓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한 편으 로는 그가 그 이야기를 모든 상황을 언급하며 말했는데, 그렇 게 짧은 동안에 그렇게 많은 만들어진 엉터리 이야기를 조작 할 수는 없다. 만약 이 모험이 의심스러워 보인다면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거짓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확인하지 않 은 채 나는 글을 쓴다. 독자여, 당신이 분별이 있다면 스스로 의 생각대로 판단하라. 나는 더 이상 판단해서도 판단할 수도 없다. 비록 그의 마지막이자 죽을 때에 그 이야기를 취소했고, 그의 이야기들에서 읽었던 모험들과 합당하고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그 이야기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 104 - 영화를 보던 관객들에게 영화 속의 배우가 갑자기 말을 건다면, “이 사건에 대해서 관객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묻는 다면 관객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상황은 영화의 일반적인 관습에 젖어있는 관객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배우는 영화 속에서 영화 속의 인물들과만 대화를 해야 하고, 그래야만 영화의 환영을 깨지 않은 채 리얼리티를 재현해 낼 수 있는 것이다. 소설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리얼리즘의 소설 속 화자나 인물들은 독자에게 말을 건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돈키호테』의 화자는 다 르다. 그리고 이 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말을 건네면서 세르반테스는 끊임없이 독자들과 소통을 하려고 노력한다. 작가는 단순히 독자에게 말을 건네는 것에 서 넘어서 내러티브의 흐름을 차단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독자의 독서를 조정 함으로써 자신이 작품의 창조자이자 주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고 있는 것이 다. 반환영주의 예술가들은 그들의 자유와 창의성에 있어서 신 들을 모방한다. 유희를 벌이는 신들처럼 자기 반영적 예술가들 은 지각되는 모습 그대로의 삶(현실)에 구속받지 않으며, 이야 기되어 온 방식 그대로의 스토리들(장르) 혹은 그럴 듯하게 사 실처럼 보이려는 의무감에 구속되지 않으려 한다. “창조의 신 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창조를 안에서건 뒤에서건 혹은 바로 위에서건 그 너머에서건 간에 항상 모습을 감추는” 스티븐 디 댈러스[제임스 조이스 소설의 주인공] 같은 개성이 없는 예술 가와 달리, 자의식적 예술가는 다른 식의 초자연적 입장을 취 하여 창조된 세계 속에 코믹하게 모습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반환영적 예술의 신은 우주 속에 내재하는 범신론적 신이 아 니라, 허구 세계 속에 떠들썩하게 개입하는 올림포스 산의 신 이다. 우리는 사건과 등장인물들로부터 떼어 놓인 채 그것들을 창조한 펜 혹은 붓 혹은 카메라를 의식하도록 유도된다.83) - 105 - Ⅴ. 결론 지금까지 필자는 『돈키호테』에 나타나는 자기반영성에 대하여 살펴보았 다. 모더니즘이 등장하기 전까지 소설의 본질은 리얼리티의 재현이라는 인식 이 팽배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을 깨뜨리며 등장한 자기반영적 기법은 매우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혁신적이고 모던한 소설의 기법이 『돈키호 테』라는 근대 초기의 소설에 나타나고 있는 것은 우연이었을까?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문학은 모방과 재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적 리얼리즘에 기반을 두고 출발하였다. 이후 개인과 그 개인이 속해 있는 사회의 모습을 작품 안에 모방하고 재현해 왔는데 이러 한 특성을 바탕으로 근대 소설들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루카치에 의해 이 러한 리얼리즘의 특성은 소설의 본질이 되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입장을 내세우면서 소설은 반드시 개인과 사회의 모습을 다루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모더니즘 소설을 강력히 비판했는 데, 이는 모더니스트들이 리얼리티의 재현에 회의를 갖고 개인적인, 감정적인, 사회가 아닌 개인의 의식을 따라 내러티브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사회적 동 물인 개인은 사회 없이는 무가치하며 이렇게 사회와 동떨어진 인간상들만 보 여주는 모더니즘의 작품들은 그 의미가 희석되어 소설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루카치의 리얼리즘적 가치를 지니지 못한 작품들은 완벽하게 리얼 리티를 재현할 수 없으므로 독자들은 작품에 동화되지 못한다. 즉, 작가가 의 도했던 환영을 가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독자에게 환영을 주지 못하 고 독자가 처한 현실과 동화되지 못하는 작품들은 독자들에게 바른 이데올로 기를 심어주지 못한다. 소설이라 함은 역사와 사회가 나아갈 올바른 방향성을 특정한 운동성을 갖고 보여주어야(루카치의 원근법)하는데 개인적인 것에만 83) 로버트 스탬,앞의 책, 189-190쪽 - 106 - 관심을 집중한 작품들은 올바른 방향성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위한 리얼리티의 재현이라는 리얼리즘에 반기를 든 것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이었다. 이 시기의 작가들은 소설에서 완벽한 리얼 리티의 재현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리얼리즘의 의미에서 ‘소설은 죽었다’고 천명한 것이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작품들은 리얼리즘이 독자들에게 주었던 환영을 깨어버리려 노력하며 문학 자체에 시선을 돌렸다. 이제 문학의 나아갈 방향을 문학 외부가 아닌 문학 내부에서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 이 바로 자기반영성이다. 자신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자기반영적 작품들은 스스로를 작품 안에서 그려내고 있다. 자기반영적 작품들은 의식적으로 독자 의 환영을 파괴하여 인공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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